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살피고 드러내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시험인 셈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면 내어놓을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애써 내놓습니다. 그것은 꽤나 준수한 증언이었습니다. 신앙은 증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일의 진행과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부활의 단편적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고 있는 게 많습니다. 미사의 구조를 말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몸이 알아서 반응합니다. 언제 일어서야 하고 언제 앉아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1독서가 끝나면 화답송이 나온다는 것도 알고 복음을 읽고 나면 신부님이 강론을 한다는 것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지식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의 근간을 차지하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십니다. 그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올바로 이해해야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조각들을 올바로 연결시키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눈 앞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붙들기 시작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기를 원하는 이들과 예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지나쳐 가셨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이 그 기회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빵의 나눔, 즉 오늘날 우리가 성찬례라고 부르는 거룩한 예식 가운데에서 그들의 눈이 떠지게 됩니다. 그들이 지금껏 함께 해 오던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비록 그분은 사라지셨지만 이제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면 속에 그분이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생존을 위해 걸어오던 길을 돌이켜 거꾸로 위험 속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모여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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