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빼앗길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고심하는 사람은 달리 표현해서 거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면 다가올 생활의 온갖 불편함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서 밥을 먹지 못해서 굷어 죽는 것도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새들도 먹이시는 분이라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분이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제 몫은 벌어먹고 살게 마련입니다.
평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두려운 일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며 살아온 사람은 그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평판을 상실하다보면 결국 그 평판으로 유지되던 현세적 삶의 기틀이 모두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곧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람들의 비위를 어떻게든 맞추려고 하고 결국 빌라도처럼 진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의 지지를 잃고 싶지 않아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나를 인정해 주실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가 스스로 구축해 놓은 '나의 것' 가운데에서 상실할 수 있는 것을 빼앗길 위험 앞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사람은 쉽게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잃은 것의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가장 소중해야 마땅한 자신의 삶도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 혹은 잃더라도 모든 것을 쉽게 회복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천사와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깊이가 깊은 말로서 달리 표현하면 '너희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 속에는 '부활' 그 자체가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추구한 것들을 모두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회복한다'는 말 안에 담겨있는 뜻은 우리의 영혼의 가치들을 말합니다. 신앙인은 영혼의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이고 그 가치들을 키워 나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신앙의 덕과 지혜, 정의, 용기, 절제와 같은 인간적인 덕목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영혼이 살아 머무르는 동안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현세에서 모은 재산, 세속적 영광, 권세 따위는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세적 가치에 목매다는 사람은 나날이 그 두려움이 증가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부활 신앙은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줄 수 있습니다. 이는 세례를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로 시작되며 우리의 죽음의 날에 완성될 일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부활 신앙을 살아가고 증언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요행 따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로마 6,3)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댓글
운전도 겁이 많아서 하기 싫어 했었고, 캄캄한 밤에는 다니는것 조차 싫어했었는데 제가 어떻게 혼자 밤에 편온한 마음으로 고갯길을 넘어 집으로 올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하느님 말씀을 굳게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