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 16,8-11)
주일미사에 빠지고
교회 규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진정한 죄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않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법과 신자의 의무를 지키면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로움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심판은 아주 소소한 일들까지
모두 체크 당하고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헌데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부터 벌써 심판에 동참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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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동참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 행동으로 드러내신 바가 바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죄의 규정이 따로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선을 넘으면 선이고 선을 넘지 못하면 악이라는 규정이 필요했고 그것에 온통 마음을 쓰며 지키려고 하지만 정작 사랑하지는 않는 이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가는 예수님에게 의로움의 길이 있지요.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이 의로움을 찾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한 표징을 찾곤 했습니다. 바로 곁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표징들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나의 바로 곁에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는데 도대체 그 사람들을 놓아두고 어디에서 하느님의 표징, 의로움의 표징을 찾겠다는 것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의로움의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요. 세상의 우두머리는 그래서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입니다. 헌데도 사람들은 세상의 우두머리를 찾아서 나아갑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혈안이 되어 살아가지요. 그 존재들이 이미 심판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심판의 길에 자신들을 스스로 올려놓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태양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뜨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 방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에 따라서 자신에게 합당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누구는 미모의 신을, 누구는 재력의 신을, 누구는 명예와 권력의 신을 만들어내지요.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엇나가는 길을 선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다시 촛점을 하느님에게 올바로 맞추고 가야 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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