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22)
이 표현을 들으면 마치 무언가 중요하고 좋은 것을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소외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아버지라는 분이 좋은 분 같은데 그걸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음알음으로 아는 이들끼리만 나누는 모습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는 모든 이에게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드러내는 분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까요.
간만에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음식을 먹는데 국에 머리카락이 하나 있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친구와의 만남의 순간이 중요하고 또 머리카락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그저 젓가락으로 그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서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청결함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음식에 머리카락을 빠뜨릴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분나쁜 것인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친구와의 친교를 망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소중한 것이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수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은 들을 수 없던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듣고 있습니다. 즉, 수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에게는 ‘법규정’이 존재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복음을 듣고 있지요. 바로 ‘철부지들에게 드러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 규정에 집중하는 사람은 철부지들에게 드러나는 진리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스스로의 완고함으로 장님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고 든 것입니다. 모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아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아집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의 자리에 계시고 당신의 빛을 환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서로 사랑하게 되고 친절하고 온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빛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돌처럼 굳게 되고 차갑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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