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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까닭



- 그분 이름으로 죄의 용서
- 그분을 아는 여러분
- 악한 자를 이긴 젊은이들
-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
- 강하고 하느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악한 자를 이김

이상의 내용은 요한 사도가 이 글을 읽게 될 무작위의 사람들이 위의 내용을 상기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이 글을 읽으면서 위의 내용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은 이들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죄인이었고 죄 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잘 누군가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 다투고 싸우기가 일쑤였지요. 우리는 분명히 죄 중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런 어두움에서 빛으로 다가오게 된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외아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의 구원을 위한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우리가 받아들인 그 구원의 빛으로 악한 자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그 악한 자는 이미 우리에게서 힘을 상실하고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올바로 알게 됩니다. 가장 전지전능하신 그 분, 그리고 그 분 안에 숨어 있는 ‘사랑의 뜻’을 올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며 악한 자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신학의 줄기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이런 가르침 안에 머무르는 우리들이 행여라도 다른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부탁을 더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5-17)

하지만 오늘날 이 요한 사도의 외침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얼마나 진지한 가르침으로 다가서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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