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평화와 안정을 지향하는 길로 구성원 모두의 자기 헌신을 요구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의 길로 그 길에서 승리하면 짜릿한 만족감을 선사하지만 언제나 다툼과 투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길이며 실패할 경우에는 처절한 비참함을 선물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아온 길이란 바로 후자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는 늘 1등을 해야 했으며 그래야 주목을 받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적어도 다른 누구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를 드러내어야 했고 남보다 나은 어떤 점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괴로워하고 힘들어 했지요.
그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리와 생명이라니 내가 추구하던 길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승리와 성공의 길을 걸어 왔으니까요. 더군다나 그분이 말하는 진리는 더욱 명백한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니 더욱 알쏭달쏭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말은 이해가 힘들었지만 그분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가르치면서 사랑하셨고 인내를 가르치면서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분의 삶의 모습만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습을 아는 이들은 그 뚜렷한 방향성 안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분을 따라 살아가던지 아니면 그분을 벗어나서 자신의 이기성, 즉 세상이 우리에게 종용하는 바를 따르던지 하는 결정이었지요. 그리고 많은 이들은 세상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지요.
십자가를 수용함으로 인한 자신과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올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된 희망이 있어야 했고 그것을 제시하시는 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말씀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이 솟아나오는 주체를 거부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지 않는 이들로 남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종교적인 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여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 실패했고 외적인 틀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세상을 더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선택은 그들의 삶의 모습으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을 돌보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의 마지막에 있는 결과를 취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뿐입니다. 모든 길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길은 그 지향하는 목적지에 따라서 좋은 길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길을 올바로 선별해서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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