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지혜 2,21)
억울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정말 성심껏 나아지기를 바래서 온갖 심혈을 기울인 누군가에게서 감사는 커녕 도리어 의심이 불거져 나오고 의혹의 눈초리가 다가올 때에 누구나 억울한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깊은 묵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고 나면 그 다음 작업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은 세상의 지식을 얻는 방식과는 조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는 영적인 차원이 가미되는 이해이고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과 악’의 영역입니다. 악의 행동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악의 움직임에 여러분이 동참하기 시작할 때에 그만큼 이해하기 쉬운 것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의인의 행동이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더 아픈 데도 덜 아픈 다른 이를 위해서 일하는 힘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공정한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영역이니까요. 세상은 저마다의 아픔을 수치화해서 비교하고 분석해서 더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에 익숙한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이 더 가 닿는 곳으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악은 결정적인 내면의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숨겨져 있지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사랑에 반대되는 움직임입니다. 악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가장 큰 어두움을 가장 깊은 내면에 간직한 채로 외적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외적인 모든 움직임을 철저히 관리해야 합니다.
악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눈이 먼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눈이 멀었다는 것이 세상적으로 멍청하게 행동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선’이라는 움직임에 있어서 너무나도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눈멀어 있고 결국 자신의 길을 어둠의 결말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악한 이들이 얼마나 불행한 이들인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더 필요한 이들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뒤에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시금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선을 제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는 ‘분별’이 뒤따라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악을 책임지려고 나섰다가는 내가 그 악에 말려들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 어떤 크나큰 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 내는 만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악에 눈이 먼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범주를 넘어선 악은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악한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최종 결과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가능하면 막아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