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계획을 모르고 그 계획이 어떻게 실행되어가는지를 모를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걱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다할 생의 계획이 없고 또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계획의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에 더없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나날이 그것을 실천해 나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술’과 ‘처세술’에서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들은 생을 면밀히 분석한 뒤에 그 안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처세술을 가르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관점 안에서 걱정 없이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무책임해지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전능하신 분에게 신뢰를 두고 있으니 이 현세는 그냥 흘려 버리듯이 살아버리고 영원만 줄구장창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원에 대한 참된 희망을 바탕으로 현세를 더욱 충실히 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영원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현세를 충실히 사는 것은 현세를 조목조목 살펴서 100퍼센트의 효율성으로 살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습 안에서 신앙 안에서의 의탁을 바탕으로 걱정없이 사는 모습은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멍청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들도 내어주는 형태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또 때로는 심지어 손해보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철두철미하게 살려는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도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부활을 사는 이들, 진정한 하느님의 힘을 신뢰의 바탕으로 삼아 현세를 적극적으로 사는 이들, 즉 사랑과 선으로 일상을 채우며 사는 이들에게는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모습의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모습의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몰아치는 배 안에서 잠을 청하던 분이었습니다. 만일 현대의 가치관에 물든 사람이 거기 타고 있었더라면 예수가 드러내는 행동에 대해서 ‘무책임하고 게으른 모습’이라면서 가차없이 비난을 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지상에서 찾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이들은 그들이 내면에 가진 힘으로 인해서 갈수록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세상에 들러붙어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일어나게 될 충돌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우리 신앙인들은 ‘걱정없이’ 살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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