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그 결과가 남아 새로운 세대인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결코 홀로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가며 우리를 앞서 살아간 이들의 영향을 반드시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영향력 가운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적 배경도 존재하지만 ‘영적 배경’, 즉 하느님과 상관 없이, 혹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진 상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세례라는 것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느님과 상관 없이 살던 삶, 심지어는 하느님과 멀어져서 살아가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하느님과 기초적인 관계 안에서 삶을 시작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되고 태초의 시야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역시도 태초의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처럼 늘 선악과를 가운데 두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시험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운데에 우리는 ‘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다가서게 되고 또 반대로 ‘악’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본격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던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던 시스템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사라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해 시스템이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어둠으로 인해서 준비되어 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마저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용서와 구원의 준비를 하셨고 그것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하느님의 외아들을 이어받아서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이 바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풀이하면 나름 정돈이 되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은 더욱 복잡다단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를 따라서 이런 삶의 지표들과 전혀 상관없이 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영적 도전들을 직면하면서 그것을 매 순간 이겨내고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두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농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얼마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사람, 애시당초 내던지고 세상에 젖어들어 사는 사람, 그리고 강한 내면의 믿음을 바탕으로 그 어떤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등등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 결론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그것에 방해를 일으키는 요소를 모두 제거할 준비도 갖추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알아나가면 됩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매 순간마다 쏟아주신 은총을 우리가 얼마나 허비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가슴을 쥐어뜯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그분의 은총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창세 때부터 그분이 준비하신 약속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겠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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