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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노력을 열심히 하면 사회적으로 좋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임계점'이라는 것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한계선이 존재하고 그것을 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리그' 안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직과 성실이 보장해 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이미 '기득권'을 지닌 이들이 숨겨놓은 현실이 존재한다. 상납과 보살핌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어느 정도 선 이상을 넘어서 나아가려면 결국 '그들'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철저한 관리 속에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지켜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윗사람의 눈에 올바로 들지 못하면 결코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 말도 안되는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힘들다. 설령 행운이 뒤따른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범주 안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사회적인 이유'로만 따져 본다면 지금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상당히 부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신흥 종교 지도자였고 이미 존재하던 기존 세력에 밉보인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군중의 인기를 규합하며 치고 올라오는 그를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거' 되어야 했다.


그들이 그어놓은 선에는 '윤리 도덕'과는 상관없는 수행규칙이 들어있다. 즉, 그들의 리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선에서부터는 '윤리와 도덕'을 서서히 내려놓아야 하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거짓에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찬사를 던지는 일도 있어야 하며 그런 결과로 얻는 '이익'으로 기쁨에 중독되어 가야 하고 또 거기에서 일부를 다시 위로, '뇌물'의 형태로 돌려주기도 해야 한다. 즉 내적 더러움에 서서히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려는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수렁이라고 볼 수 있다. 때로 드라마나 영화로 내비쳐지는 모습은 사실 실제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확실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실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세상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현실에 예외를 기대하고 그 길을 갈망한다는 건, 채식주의자인 사자를 기대하면서 정글을 순진하게 걸어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글을 적으면서 따로 독자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이미 그렇게 하고 살 수도 있고, 그걸 갈망하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아직은 거기까지는 가 닿지 않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저마다의 길을 이미 걷고 있는 셈이다. 원하는 대로 얻게 되리라.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는 길이 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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