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살인 시스템'인 '낙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아우슈비츠로 잘 알려진 유대인의 대량학살은 현대에 각 낙태시술병원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이 현대의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인간의 존재 여부를 우리가 정한 기준대로 판단해서 그 인간이 살아남아도 될지 아니면 죽어 마땅할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대의 살인공장은 인류의 탐욕과 이기성, 그리고 무책임한 성이 존재하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사제로서 이 문제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혼'은 인간의 살인행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파괴하면 거기에 있던 프로그램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인간은 '포멧'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과학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실마리나 해결책도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부분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이고,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조금이라도 영원하신 분에 대한 신앙이 살아있는 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간단하다.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낙태된 아이들의 영혼은 '가장 사랑받아야 마땅한 이들로부터 거부당한 영혼'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 이후에 역시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그들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거부하고 삶의 기회를 약탈해 버린 그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한 사제의 무모한 상상 정도로 취급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요소 안에서 충분히 그 근거가 될 요소들을 충분히 취합할 수 있는 문제다.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 (시편 16,10)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지혜 3,1)
나는 재능을 타고났으며 훌륭한 영혼을 받은 아이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훌륭한 영혼으로서 티 없는 육체 안으로 들어갔다. (지혜 8,19-20)
그렇다. 성경은 일관되게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그 육신의 죽음과 상관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혼이야말로 하느님의 최종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말한다. 낙태를 자행하는 이들, 낙태를 알면서도 방관한 이들, 낙태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 우리는 역사의 심판대에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사형 선고했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은 그저 일어나는 일의 하나의 부속품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히 죽어간 이들의 불행 앞에서 합당한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아마도 우리는 낙태라는 현실 앞에서 수많은 핑계와 변명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주를 이룰 것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 어디서부터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이봐, 우리는 그걸 몰랐어.” 하고 네가 말하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알아보시지 않느냐? 영혼을 지켜보시는 분께서 아시고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신다. (잠언 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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