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활동들이 고통을 어떻게든 경감시켜보려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이 없어서 닥칠 수 있는 성가시고 귀찮고 안타까운 일들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낙태도 안락사도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니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중심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신앙의 자리는 사실 얼마나 힘없는 초대가 되겠는가? 고통이 싫어서 도망다니고 피하는 사람들 앞에 '고통'을 들이대니 얼마나 거부감을 느끼겠는가? 부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표현은 아름답지만 현세에서 다가오는 구체적인 고통들을 마주하고 그것을 끌어안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무엇보다도 곤란한 현실은, 그런 고통을 끌어 안아서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는 이들이 정작 지상 생활에서는 그 상급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들의 상급은 '영원'안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라 정작 그들이 숨쉬고 살아간 이 땅에서 관찰되는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도리어 저주받은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내내 육체의 짐을 지니고 살아간 수많은 성인들의 모습, 또 신앙 때문에 충분히 누릴 것도 다 빼앗기고 목숨마저 빼앗긴 순교자의 모습을 우리는 '성지'라는 미명 하에 곳곳마다 꾸미고 장식하고는 있으나 정작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저마다 자신 없다며 도망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난 주일은 '성소주일'이었다. 성소가 준다고 교회는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이 '성소'에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신학교가 의외로 편하고 즐길거리가 많다는 것을 한껏 광고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은 결국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일 뿐이다. 사실 성소의 문제는 한 젊은이를 끌어들이느냐 마느냐의 피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보다 심도깊은 차원을 포함한다. 즉, 우리 교회가 그동안 어떤 모습을 보여왔고 젊은이들이 어떤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되는 가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교회 안의 어른들, 즉 부모 세대들이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고 있는가의 문제이고, 그리고 그런 부모 세대를 바라보는 자녀들의 내면 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고귀한 열망과 연관되는 것이다.
성당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내면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서는 집에 돌아와서 성당에 대한 온갖 잡설과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의 집에서 '성소'가 크리라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하느님에 대한 진솔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심껏 봉사하고 그로 인해서 집안에 믿음을 기초로 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정에서 건강한 성소도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결국 '십자가'로의 초대이고 '고통'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가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다. 문제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바로미터가 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내 삶에 끌어들여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는 세상, 그 가운데 '의미있는 고통'을 전하고 가르치는 우리의 신앙. 이런 구조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수박 겉핥기식 피상적 신앙에만 머무르다가 생을 마감하고 떠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간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환대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올바로 바라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영역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이들의 최상의 결론은 더한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하는 초라한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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