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가락으로 내 뺨을 꼬집으면 통증이 바로 느껴지고 또 꼬집는 손가락도 쉽게 멈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통증의 순환주기가 멀어질수록 인간은 '둔감'해집니다. 즉, 내가 가하는 통증과 그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순환의 고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쉽게 고통을 가하고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우리의 죄를, 코로나를, 또 기후변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책임의 결과가 우리에게 멀리 돌아오기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애 동안 내가 행한 행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선을 넘어서 찾아오기 때문에 인간은 결과를 숙고하기보다 당장 나에게 다가오는 쾌락의 요소를 탐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이 코로나의 시기에도 감염 위험성이 높은 행위를 어렵지 않게 하고 나아가 환경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특히나 순환의 고리가 '먼' 환경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겨 버립니다. 적어도 내가 머무르는 세대 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문제라는 것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낙태가 부모와 아이 가운데 아이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자행되듯이, 환경이라는 문제도 비슷합니다. 가장 힘없는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다음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의 가치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시선을 이끌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갈 시대가 아니라도 우리는 후대를 함께 생각하고 영원 안에서 다시 만날 이들로서 지혜로운 삶을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영원을 생각하기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이들이기에 설령 나에게 이득이 된다 해도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자 나의 이득을 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신앙과 공동체 정신 속에서 사회의 모든 요소가 바로잡힐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나의 이웃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나아가 다음 세대에게도 좋은 것을 남겨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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