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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살아가다




차의 성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차를 관리하고 조작하는 주인도 중요합니다. 가끔 차 엔진의 오일을 단 한 번도 갈지 않아서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 결국 엔진을 망가뜨려 버리는 운전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차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멀쩡한 차도 망가지게 하는 이들입니다. 거기에다가 술까지 진탕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운전자라면 차가 성할 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숨지게 하는 사고라도 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는 차는 물론이고 자신의 안녕까지 기꺼이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훌륭한 운전자는 비록 낡은 차이지만 꾸준한 관리과 섬세한 운전으로 차의 상태를 늘 최상으로 유지하고 언제나 안전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떤 차를 몰더라도 같은 마음으로 차를 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많은 달란트를 지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영혼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의 운전수로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을 모시기를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상태, 그 상태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모든 것을 처리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궁극적인 완성은 우리의 죽을 몸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실 죽음이라는 최후를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이 없는 이들은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뒤쫓아오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위협적인 괴물 앞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탈출구가 없는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죽음 앞에 좌절하고 허무에 빠져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를 망각하기 위해서 어딘가에 집착하고 중독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후자를 선택해서 어떻게든 자신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죽음의 올가미는 자신을 더욱 옭죄어 옵니다.


반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믿음을 두고 살아왔고 세상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마치 부산에서 KTX를 탄 사람이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맡긴 종착지는 자동으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역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죽겠지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한계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두 번째 의미로서의 영혼의 멸망을 겪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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