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신앙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세속이라는 곳에 물들어 있는 그의 마음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세속이 그를 잡아끄는 힘과 그의 내부에 있는 세속을 사랑하는 힘을 뒤바꾸는 것은 한 사람의 고집을 꺾는 것만큼 힘드는 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선택지들은 이것을 선택하다가 저것을 선택해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이 직장을 다니다가 저 직장을 다닐 수도 있고 이 음식을 좋아하다가 저 음식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으로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은 이전에 해 오던 것이 하느님 앞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서 더 힘듭니다.
특히나 세상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두둔하고 치켜세우는 가운데 신앙의 초대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가르쳐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그가 이전에 몸담아오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즈카르야는 오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전하는 즈카르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올바른 보답을 하기는 커녕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느님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입니다. 당신이 위대한 전능을 지니고 있다면 사람들을 호되게 당하게 하고 마음을 바꾸게 하면 될 터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그분의 지혜로움입니다.
의인의 수난은 악인의 내면의 악을 확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의인의 상급을 더욱 키워 줍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오직 영원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시선으로는 하느님의 지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원 안에서 베풀어지게 될 마지막 결과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가 본질을 드러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그리고 희망은 자랑스러움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환난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의 수난이 잠시 시작되고 그치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변 사람들과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과 반대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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