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자동 기계 장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셨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것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뻐할 이유는 딱히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자신이 지닌 그 고유한 자유 안에서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 안에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자유의 상태가 존재합니다. 비유는 어찌보면 본연의 뜻을 감춘 표현입니다. 본질을 바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듣는 사람이 노력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숨겨진 뜻이 담긴 시 한 편을 듣게 되면 저마다 감상이 달라집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김 동 명(1900-1968)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내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우 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물게 하오
이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나그네와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이런 시적 표현을 들을 때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겪은 사연을 바탕으로 참 절묘하게 묘사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못 알아듣다가 이 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뒤늦게 '아하!' 하고 깨닫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쓰십니다. 비유는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고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서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일종의 초대이자 경고의 역할을 합니다. 보고 듣고 깨달아 돌아오면 고쳐주겠다는 초대이면서 동시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고쳐주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 문제는 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듣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보고 들었지만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고 듣는 주도권이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달린 셈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이 강론의 시간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시작부터 걸려 넘어집니다. 지금 전달되는 말씀 안에 내재되어 있는 뜻이 무엇인지 알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메마른 땅과 같아서 소리가 귀에 들어오긴 하지만 순식간에 그 말씀을 더러운 영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또 어떤 이들을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이 뿌리내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내가 지난 주에 들었던 말씀 가운데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속 안에서 이미 걱정거리가 가득해서 영혼 가득히 그 걱정과 탐욕으로 채워져 말씀이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캐내어 자신의 생활의 근거로 삼는 이들은 그 말씀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변의 영혼들을 초대합니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영혼들을 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비유는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자신의 문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들을 의도가 없으면서 그저 성당에 앉아 있다고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 귀에 아무리 경을 읽어봐야 소는 이미 집어삼킨 위 속의 풀을 되새김질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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