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혀 기쁘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을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런 상태에서 뭔가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코미디 프로에서 발견하게 되는 계산된 발작성 웃음일 뿐입니다. 오로지 참된 기쁨만이 다른 이에게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실패하는 영역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를 기쁨으로 인도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그 기쁨을 줄 수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고 그분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타인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쁘지 않은 신앙인들은 신앙생활도 전혀 기쁘지는 않으면서도 뭔가 ‘성취하는 느낌’을 주는 신앙생활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은 기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음식을 입으로 우겨넣는 것처럼 신앙에 대해서 딱히 간절함이 없더라도 그런 종류의 생활은 내 생활 곳곳에 우겨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의미없이 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마음 없는 헛된 제물’이 당신께는 필요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외적 행위들을 가중시키는 건 바로 그런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우겨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기쁨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었지요.
우리가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부족함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는 ‘은총’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은총을 우리에게 건네기 위해서 구세주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기쁨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사이의 통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의 존재가치가 설명이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구세주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아픔에서 구해내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사람들이 이해할만하게 전해 주기 위함이지요.
물론 여기서 교회의 다양한 면모들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도 있고 역으로 그 역할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방해하는 교회 앞에는 ‘예언자’라는 특별한 사명을 지닌 이들이 등장을 하게 되지요. 예언자는 엄할 수도, 온유할 수도, 매서울 수도, 친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지닌 달란트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오 신부님 같은 성인도 모시고 있고, 또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성녀도 모시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어딘가 부족한 교회의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교회에 파견됩니다. 그리고 생애 동안 이해를 받지 못하다가 때가 이르러(심지어는 그것이 그의 사후일지라도) 그의 사명이 꽃피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그의 삶을 돌이켜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은 기쁨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형성된 생명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은 외적인 압제와 핍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쁨은 바로 그 영원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희망 속에서 끈기를 발견하고 믿음 속에서 실천할 힘을 얻고 사랑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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