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9)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합니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었고 구해 주셨지만 그의 육신은 적대자들의 음모와 죄악에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구원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세상의 고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니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지 세상 안의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놀려댈 것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믿는다더니 꼴이 좋구나!’ 하고 놀려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을 때에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오해와 왜곡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삶을 지속해 나갑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구원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참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통해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세상 안의 어느 지점이고 그것이 모든 이들의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도 그 길을 기꺼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고 그래서 오직 믿는 이들만이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들을 성인으로 추대하고 신앙인들은 그들을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맞서는 이들은 우리가 내적으로 지닌 진리와 성실과 책임감, 선함과 의로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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