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수학에나 사용되는 덧셈과 뺄셈의 오류를 우리가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카이스트에 다니는 대학생이나 알만한 내용의 오류를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교회 내의 영역 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때리면 되느냐 안되느냐를 두고 고민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 다단한 교회법에 해당하는 사연을 지닌 이가 다가와서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하는 유형의 질문은 당연히 복잡함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고차원적인 문제는 고차원적인 이들에게 맡겨서 도움을 얻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고차원적인 문제를 고심할 이유는 크게 없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쉬운 일인데 복잡하게 간주해서 손을 놓아버리는 경우’입니다.
직장 안에서는 복잡한 프로젝트에 매달려서 수많은 시간을 고심해서 일의 해결점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멀쩡한 사람이 성당에만 오면 초등학생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당장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분명한 일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주저하고 있게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펴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매진하면 됩니다. 헌데 그분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해 버리면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가 뒤섞여서 하느님의 일로 포장될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이 너무나 좋은 레지오 간부가 회원들에게 레지오 주회는 ‘끝까지’ 참석해야 한다면서 술자리를 종용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을 바탕으로 ‘레지오’라는 거룩한 신심행위를 더럽히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마주한 수많은 신앙 현안들이 반드시 전문가의 분별이 필요한 사안일까요? 아니면 그 일만큼은 내가 하기 싫어서 미뤄두는 것일까요? 성당에서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성당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며 우리에게도 같은 길을 걸어가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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