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다가오는 사람은 의외로 굉장히 적습니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때가 되어 오거나 외적 죄의 틀에 어긋난 행위를 구체적으로 했기 때문에 오거나 남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오거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그 모든 이들을 품어 안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품어 안는다는 것이 그들이 고해소 안에서 어떤 것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품어안음은 영혼에 대한 연민을 말합니다. 즉, 모든 죄를 고백하는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기본적인 관념이지요. 하지만 그 품어안음은 구체적인 면에서 서로 달라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위로’를 원할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아파하고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품고 교회 공동체 앞에도 그러하다면 그는 이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짐작하다시피 많은 이들은 이런 태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일찍부터 알고 계신 하느님과 논쟁을 벌이러 옵니다.
하느님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서 고해소를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논쟁은 고해소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 사제에게 자신이 하는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 받고 싶으면 고해소가 아니라 고해소 밖에서 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모종의 토론을 하고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던지 아니면 사제에게 설득 당하던지 해야 하겠지요. 헌데 사람들은 이러한 논쟁거리를 고해소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담판을 지으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서 죄가 없다고 믿는다면 고해소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고해소는 죄가 없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데 고해소에 들어와서 자신이 죄 없음을 끊임없이 항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해소를 무슨 사법기관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누구 앞에서 고해를 보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제는 여러분의 소송 내용을 듣고 판단을 내려주는 판사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전하는 도구로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소 안에는 자신의 죄를 올바로 깨닫는 죄인이 들어와야 합니다. 남편의 죄와 시어머니의 죄, 자식의 죄를 줄줄이 늘어 놓으면서 결국 본인은 전혀 탓이 없다는 소리를 하라고 고해소가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제는 필요하다면 적절한 충고를 통해서 상대의 현상태를 깨닫도록 도와 주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회개에 가 닿도록 인도하기도 해야 합니다. 사제가 마냥 위로만 던져 주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의외로 쉽지 않은 성사입니다. 인내가 필요한 성사이고 식별이 필요한 성사이며 사랑이 필요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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