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마태 3,9)
간단한 이야기를 한 번 해 봅시다. 여러분이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수박을 사기 위해서 수박이 늘어선 과일코너에 가지요. 그리고는 수박을 하나 집어듭니다. 왜냐고 물어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수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집어든 수박이 여러분이 상정한 기준에 합당하기를 바랍니다. 즉, 싱싱하고 맛이 들어 있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몇가지를 검증합니다. 두드려서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꼭지가 싱싱한가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금 갈라서 속의 내용물을 보기도 합니다. 헌데 여러분이 정한 그런 기준들에 부합하지 않는 수박이라면 여러분은 다시 그 수박을 내려놓고 다른 수박을 집어 들겠지요.
위의 성경 구절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물론 유대인들을 고르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는 그것을 검증하셨습니다. 헌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에 거꾸로 속이 곯아버린 수박이 되고 말았습니다. 쓸모없는 수박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이 두번째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이나 육욕에서 비롯되는 이들이 아니라 거룩한 영에서 태어나는 이들입니다. 영과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를 외적인 틀에 묶어두려고 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지요.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이어받아 지상에 세워진 저승의 세력도 무너뜨리지 못할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올바로 소속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 형식과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 살 때’ 가톨릭 교인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할 때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입니다. 학생을 후두려패고 성추행을 하면 그 선생을 더는 선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범죄자로 보지요. 환자를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환자에게서 돈을 뜯어 내려고 하면 그 역시 의사가 아닙니다. 탐욕스런 사람일 뿐이지요. 이와 같은 말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수도자에게 모든 사제들에게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단지 그들이 생각이 글러먹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자가 아파서 수술 부위를 도려내는 것과 이 환자는 병이 있으니 죽여 버려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움직임입니다. 하나는 ‘치료’라고 하는 것이고 환자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교회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는 생생히 살아 있고 거룩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요한 4,23)” 드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외적 교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외적 교회는 바로 그 진실하게 예배하는 이들이 합당한 인도를 받고 또 현세의 여러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훈련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여러가지 은총의 선물로 가득한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 외적 교회는 언제나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부족함이 그 교회의 외모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실망스럽게 만들었고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순교의 피 위에 성실함과 책임감과 참된 신앙으로 무장한 선한 의지를 가진 수많은 신앙인들이 굳은 반석 위에 서서 교회를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실망하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 속에서 악마가 원하는 증오와 원한을 키울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아무런 도전도 없이 커나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사랑은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커 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불같은 시련이 마련되어 있고 모두 불소금에 절여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 악마는 끊임없이 우리를 갈라놓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일치를 가로막아 양들을 공격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욱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자녀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된 분의 뜻에 합당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하신 분이 기대하는 달콤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싱싱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선택되었으니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외적 신앙활동에만 열중한 채로 실제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훗날 주님의 손에서 내려지게 되고 주님은 다른 선택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분명히 선택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 선택에 합당한 응답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에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같은 침상에서 잠자던 이들 가운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놓아두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하게 섬긴 이들이 자신의 선택에 꾸준히 응답한 결과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신의 선택을 소홀히 한 이들은 그 합당한 결과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은 하느님에게 맡겨 두면 됩니다. 우리가 나서서 세상 모든 것의 심판관이 되려고 하다가는 우리 역시도 같은 잣대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들보를 올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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