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 생활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실제 그 생활을 해 보는 것입니다. 군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가 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경험으로써 대상을 잘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어떤 종류의 독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그 독을 먹고 마셔야 할까요? 그건 멍청한 짓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 스스로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독에 대한 사전지식을 배우고 그 독을 먹으려는 이를 가로막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현명한 일입니다.
사제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농담처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사회생활 안 해 보셨잖아요.', 또는 '신부님은 결혼 안 해 보셨잖아요.'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정당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이를 혹독하게 겪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독소가 인간을 파괴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위험 요소에 대해서 충분히 경고할 수 있고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의사는 그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병을 겪어야만 한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의사는 코로나에 걸려야 하고 산소통을 매달고 고생을 하다가 깨어나야 할 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의 핵심은 '대화'에 달려 있습니다. 두 인격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상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단연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도 대화 나름이지요. 건설적이고 아름다운 대화가 있는가 하면 상대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대화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화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문제는 초기에 다들 사랑으로 시작을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듯한 체험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순전히 '인간적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칭송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가볍고 일시적인 느끼는 사랑, 그것은 마치 한때의 술기운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가장 잘 도와주는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세상에 '성공한' 부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기 직전까지는 절대로 결과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에 기댄 '사랑'을 실천한다면 여기에는 상당한 신뢰를 둘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영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 때문에 용서하고 다시 희망을 품는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 때문에, 즉 하느님과의 관계 때문에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서로에게 실망하고 부딪히고 괴로워하는 부부는 생겨날 것이고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런 가르침은 다가가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마음이 어두워지고 나면 그 어떤 빛도 거부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욱 유약한 존재가 되고 더욱 갇혀 지내려고 하면서 일시적인 쾌감을 주는 요소에 매달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포기해도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언제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 다시 시작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관계에는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증여와 꾸준하고 성실함이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서서히 모으고 쌓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 버리듯이 신앙에 기댄 쪽의 배우자가 꾸준히 상대를 향해서 사랑을 증여한다면 결국 하느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고 그분이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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