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주고 받을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 안에 공존하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쉽게 나누어 줄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도 가능합니다. 멀쩡하던 믿음에 그 반대되는 요소를 끊임없이 강요함으로써 숨막히게 하고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언가를 확실히 본다고 그 순간부터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이의 근육을 떠올리는 게 더 낫습니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훈련을 하면 미약하게 성장해서 탄탄해지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어느날부터 운동을 멈춰 버리면 서서히 줄어들다가 결국 무기력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믿음은 그 핵심이 영혼의 내면에 달려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상황과 조건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감각할 수 있는 주변의 사건들을 통해서 꾸준히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은 약화되어 있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교회가 성사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성사적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크나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실망스러운 일들은 우리의 믿음에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근본적인 영역은 외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내면과, 즉 자유의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성당을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조치로 실시간 미사라도 대송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런 조치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치'일 뿐입니다. 충분히 양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스켓 하나로 견디라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이 장기화되다 보면 분명히 조금씩 신앙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힘을 모아 이런 장기화되는 신앙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을 향한 봉사의 기본을 다시 세워 나가야 합니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쉽게 또 자주 신앙적 체험의 기회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서 행여 더욱 소외 당할 수 있는 이웃을 위한 배려에 힘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신앙은 근본적으로 우리 각자 개인의 내면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바이러스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할 수 있고 찾아 누릴 수 있는 신앙적 기회들을 찾아 누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가로 데리고 가도 마시지 않으려는 양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양 스스로 갈증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나 쉽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요소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어떤 곳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행중에 있는 이들이며 성장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찾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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