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학생시절이던 무렵 성당에서 유행했던 학생 대상의 활동 가운데 대표격으로 '신앙학교'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대구에서는 '단체생활', '야영', '모닥불'에 곁들인 몇가지 신앙 프로그램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지요. 신앙학교의 핵심 출발점은 다름 아닌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야외활동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관점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활동은 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신앙'은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본질인 신앙보다 활동이 득세하게 됩니다. 올해는 이런 활동을 가져와서 해 보면 어떨까 또 다른 해에는 이런 활동이 어떨까 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대학생활이나 군대 생활 등등에서 재미있었던 것을 실험적으로 시도해보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여러 소년 활동들이 접목된 셈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스카우트 활동 가운데 야영생활이 상당 부분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카우트의 본질적 특성은 쏙 빼두고 멋있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만 잔뜩 가져왔기에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멋진 모닥불을 준비하려다 사건 사고도 많았지요. (참고로 저는 스카우트 상급 지도자 훈련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조금은 더 분별력 있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이 시작됩니다. 좋은 교리교사의 자질로 신앙적 헌신이 우선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기술적 능력을 발휘하는가, 얼마나 많은 외적 경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리교사로서 신앙을 얼마나 잘 전하는지는 측정될 수 없으니 뒤로 제쳐두고 신앙학교 같은 것을 얼마나 잘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와 같은 것이 더 중요한 지표가 된 셈입니다. 또한 젊은 세대가 점점 빠져나가게 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금반지 같은 상을 주면서 어떻게든 경력 교사를 붙들어 보려는 시도를 한 셈이지요. 그가 진정으로 신앙 안에서 올바른 신앙 교육에 헌신하는지 아닌지와는 상관 없이 그저 성당에서 빠지지 않고 뭔가 하고 있었기에 상을 주는 셈이었습니다. 심지어 성당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달리 할 일이 없고 성당에 오면 경력을 존중받고 술도 진탕 마실 수 있기 때문이라도 상관이 없는 셈입니다. 그저 몇 년 이상만 더 채우면 새로운 상품, 새로운 명예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지요. 세상의 능력과 더불어 성당의 능력을 성장시켜 온 게 아니라 세상에서 받지 못하는 인정과 관심과 사랑을 성당에서 대신 채우려는 이들이 생겨나는 셈입니다.
반면 본질이 되어야 마땅했던 신앙교육의 현장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신앙 주제를 전해줄지 고민하고 연구하는 교리 교안 따위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이고 그저 젊은 사람이 성당에서 뭐든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시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젊은이들의 도시 유출은 막을 수 없었고 지금은 젊은 엄마들이 대거 들어오게 됩니다. 남겨진 주일학교의 유산을 붙들고 애써 뭐든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본질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인상은 지울 수가 없게 됩니다.
주부로 대체된 교사단은 젊은이들의 헌신이 가능하던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신앙 조차도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해준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만 다른 도리가 없는 셈입니다. 행사처럼 하던 여름 신앙학교도 이제는 교사들이 준비할 이유도 없이 한동안은 해외로 여행을 다니거나 혹은 돈만 주면 뭐든 대신해주는 기관에 '위탁' 운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당을 다니면서 신앙 교육을 받는 데에도 이제는 '자금'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 고민하고 아이들의 보다 나은 신앙을 염려해야 할 이유가 갈수록 더 사라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집에 돈이 부족한 가난한 아이들은 성당 활동에 같이 할 여력이 안되어 부끄러워서라도 성당에 나오기가 힘들어 질 것은 뻔한 일이겠지요.
지금은 제가 '관찰'할 수 있는 입장이라 아니라서 현실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서 서술한 것의 결과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올바로 회복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사목자는 분명히 인지하고 항상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비록 성당에 아이들이 없어도 그 얼마 안되는 아이들에게 보다 진솔한 신앙에 다가설 수 있는 노력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들이 성당에서 훌륭한 신앙 체험을 하고 훗날 더 많은 다른 이에게 신앙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숫자'를 유지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더 좋은 간식'이나 '더 좋은 여행지'와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는 결국 그들은 성당보다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키우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행사를 치르는 데에 돈이 듭니다. 과연 수많은 화려한 행사들이 아이들을 성당에 묶어놓을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앞으로는 이런 고민을 함께 할 젊은 신부님들부터 서서히 씨가 마를 예정입니다. 신학생의 비율이 해가 갈수록 확확 줄어드는 것이 뻔히 보이는 지표이니까요. 과연 신앙교육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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