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들 사이에 한때 '영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뭔가 내면적인 것을 추구한다 싶으면 무조건 '영성'이라는 말만 붙이면 다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영성은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단어였으니까요. '신앙'은 뭔가 우리를 속박하고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느낌이라면 '영성'은 조금은 느슨한 느낌으로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유행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최근에도 어렵지 않게 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조금은 부드럽게 세상과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영성'이라는 것으로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런 움직임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일까요? 어떻게든 우리를 속박시키려는 것으로부터 모두 탈출하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헛된 종교적 틀은 예수님도 거부해 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기도 하시고 손을 씻지 않았다고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질을 찾는 움직임이 모든 '틀'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큰일납니다. 신앙의 고유한 영역 속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를 구속시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다보면 결국 '십자가'조차도 거부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의 오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영성은 경계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요가도 영성이고 도를 아시는 것도 영성이고 심리 프로그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영성이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화된 것들은 서로 뒤섞이기 쉽습니다. 그 말은 그 안에 내포된 좋은 것만 영성으로 들어와서 좋은 영향만을 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위험 요소까지도 '영성'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분별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교의와 상관없는, 아니 교의 자체를 혼탁하게 하고 무너뜨릴 수 있는 전혀 다른 것도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전히 위대한 스승으로 치부한다거나 혹은 그의 인성을 무시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을 에너지로 바꾸어 버린다든지 하는 등의 여러 요소가 골고루 섞여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것들이 영성으로 포장되고 나면 결국 우리는 영성을 '쇼핑'하게 됩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담아 먹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신앙의 근본은 그 선택에서 배제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성숙한 우리에게는 마치 우리를 구속하고 속박하고 괴롭히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고 참된 가치가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미에 맞는 것을 선별하는 상태, 이것이 오늘날의 영성이 가진 근본적인 위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 핵심 진리를 지니고 있고, 또 그 틀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은 골라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아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훈련의 장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성사와 전례의 틀 속에서 실제로 시간과 노력을 헌신하면서 우리는 신앙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조금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신앙 안에서 얻어질 수 있고 훈련해야 마땅한 것을 '영성'이라고 포장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지닌 이름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헛된 것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배웠고 그 안에서 성실하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댓글
저의 신앙생활하는데 많은 도움됩니다.
혹시 내일 5월 15일 토요일 미사는 몇시에 하나요.
가능하면 매일미사 시간을 알고 싶어요.
신부님~
오늘도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