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타인에게 시선을 두고 그를 열심히 평가하지만 그와 유사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두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주제가 정치이건 연예계 스캔들이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서 열렬히 비판을 가하고 수정을 가하고자 하는 사람 치고 정작 그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에게 스스럼없이 수정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온전히 '합당하고 이성적이고 올바르다'는 헛된 근거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곁에 사람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는데 그 수와는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없다는 공통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가진 힘으로 인해서 그에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이 몰려 있거나 아니면 그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거나 하는 극단적 형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어떠한지를 비추어주는 '거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와 함께 하는 모임에서 그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참고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재미난 건 그 사람은 그 어떤 사소한 수정도 용납하지 못해서 곁의 사람들이 두어번 수정의 시도를 하고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가족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는 근본적으로 '외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타파하고자 관계에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몇 번 만나보게 되는 사람은 그의 본질을 머지 않아 깨닫고 더욱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그는 더한 외로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도 '인내'가 요구되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교회는 잘 듣는 것의 미덕을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많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잘 듣는' 사람으로서 먼저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한다.
기도라는 것은 사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정해진 양식을 끊임없이 되뇌이는 것이기보다 우선적으로 '듣는' 훈련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바를 고요한 가운데 들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는 언뜻 많은 말을 외우는 시끄러운 기도 같겠지만 실제로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우면서 마음을 잠재우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듣는 기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은 우리를 '들음'으로 초대한다.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고 그런 들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완성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귀를 열고 주변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연스레 겸손에 가 닿을 수 있다. 끊임없이 타인에 시선을 두고 수정과 비판을 가하려는 이는 이런 잠잠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잘 말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 그저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면 안되겠지만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서 말만 하려고 하는 것도 만만찮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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