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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앞산 밑자락에 있는 공동 사제관을 나와서 아래로 10여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신천이 나온다. 신천에는 잘 조성된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로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면 의외로 볼거리가 많다. 물이끼가 잔뜩 끼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독한 냄새는 나지 않는 신천의 물, 그 위를 노니는 원앙 한 쌍, 목이 긴 새 한마리, 꽤나 몸집이 커서 멀리서도 보이는 잉어들... 하지만 그런 자연과 더불어 관찰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유달리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햇살 좋은 날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남자 어르신들이었다. 언제나 장기판이 마련되어 있고 두 사람은 진지하게 그것을 쳐다보면서 다음 수를 생각하고 나머지 분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며 구경을 한다. 남성의 특징인걸까? 경쟁을 좋아하고 무리 생활을 즐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 열심히 몸담아 오던 생활에서 벗어나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나이 많은 자매님들도 관찰할 수 있지만 자매님들은 그런 눈에 띄는 모임을 만들어 놓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소규모로 옹기종기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열심히 씰룩씰룩 걸어가면서 옆의 자매에게 쉴새 없이 떠드는 모습이 자주 관찰될 뿐이다.


성당에 자매님들이 유독 많은 것은 그 자리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르신 세대에는 주로 남성들이 일을 해 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성당에서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남자들의 경쟁 구도는 성당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해서 그래도 여윳돈이 좀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활기있게 성당 생활을 하는 반면, 밖으로만 나돌던 어르신이 성당에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을 듯 싶다. 반면 자매님들은 친교 관계를 성당에서 맺어 두기 때문에 성당에 나아오는 것이 훨씬 더 부담이 덜하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당에서 인정을 받으니 성당 나오는 재미가 쏠쏠할 듯 싶다. 심지어는 집안에서의 모습과 성당에서의 모습의 극적인 차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성당에 나오고 싶어하는 형제님들의 발길을 막고 있는 자매도 충분히 있을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사회 전체가 고령화되었고 초고령화 사회로 나가는 중이다. 연령대 자체가 지방에서는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는 데다가 신앙감 조차도 약화되어 성당에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낸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세대의 탈출을 더욱 가속화한다. 성당에서 젊기에 힘든 일이 모두 몰리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함께 나누어 본다.

- 성당에 다니는 자매님들은 주변에 알고 있는 남자 어르신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성당으로 초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성당 일 가운데에서 정말 근육을 써야 하고 힘이 부치는 일이 아니면 어르신들도 충분히 자발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젊은 세대에게 귀찮고 성가신 일을 다 몰지 말고 어르신들이 나서서 실천하고 성당이 낯선 이들의 적응을 도울 필요가 있다.

- 성당을 보다 개방적으로 운영해서 주변에 있는 이들이 스스럼 없이 올 수 있는 만남의 장으로 활용을 하고 그 가운데에서 선교 대상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젊은이들에게 어르신의 활동을 연구하고 준비하고 돌보게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연령대에 맞고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이런 요소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핵심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사항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정말 전하고자 하는가 하는 신앙적 열의라고 볼 수 있다. 압력이 꽉 찬 풍선에서 어느 구멍으로든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신앙의 열정이 꽉 찬 본당은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성당 자원을 활용할 것이다. A 본당의 상황이 다르고 B 본당의 상황이 다르다. 모든 본당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실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려는 의지를 회복해야 한다. 늙는 것은 신체가 아니다. 열정이 늙고 생각이 늙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본당은 너무 늙은 것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뼈마디에 힘을 실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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