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금속 장인이라면 상한 놋그릇을 다시 녹여서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상복귀됩니다. 내가 디자인하고 만든 것이니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술이 없다면 우리는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영혼이 깨집니다. 인간은 영혼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추스를지 모릅니다.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고 그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놓으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데 문제는 물건의 단순한 이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훔친 순간 나의 영혼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물건을 아무리 돌려놓아도 나의 내면에는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죄책감'이라고 부릅니다. 영혼의 흠인 셈이지요.
영혼을 만드신 분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용서'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용서'의 과정을 형식화 시켜 버립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한 진정한 용서가 아닌 교회법적 절차를 거쳐서 원금상환을 하는 개념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어떻게든 고해소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자동 청소'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죄책을 메꾸려고 봉헌도 해보고, 봉사도 열심히 해보는데 뭔가 개운치 않습니다.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서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가 미비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외적인 척도로 재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통독을 10번 하면 자동으로 회개가 되고 하는 식의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내가 진정으로 잘못함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뉘우치는 깊은 내면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외적으로 측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죄를 메꾸기 위해서 엄청 힘든 외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가 쉽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넘기 힘든 벽은 내가 스스로 나의 내면에 세워놓은 벽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똥을 싸도 웃으면서 치울 수 있는 아내가 남편이 잠깐 어질러놓은 건 지켜보지 못하고 화를 내는 건 내면에 존재하는 그 벽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는 없는 벽이 남편에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 자체가 힘들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 수용이 되지 않아서 힘든 것입니다. 회개는 이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외적으로 힘들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힘든 일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는 것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죄스런 나의 존재를 죽여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밀알은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죽어야 진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작업이 너무나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내려놓는 수고때문에 차라리 그것을 지니고 살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만드신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우리의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올바른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홀가분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영혼을 만드신 하느님은 그것을 깨끗이 하고 돌려줄 능력도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혼의 장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이사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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