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악한 사람'은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 갈증은 너무나도 뿌리깊은 것이라서 그 무엇도 사실상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만족을 얻는 순간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관심을 끌어올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쉬운 수단은 '자기 피해자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의 관심을 끄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불쌍함에 동정이라는 관심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자신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스스로도 예상하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에게도 '미끼'를 던져줍니다. 즉 필요에 따라서 남들 칭찬도 해 주고, 선물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일한 목적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자녀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 쉽습니다. 자신의 부모인 사람이 '정의'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기준으로 자녀들의 행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위를 하면 칭찬을 얻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자녀들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두운 내면을 가진 부모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동시에 앞서 말한 '미끼'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부모가 항상 '불쌍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위선적'인 사람이며 심지어 '악한'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릇되이 형성된 이 관념은 깨어지기가 꽤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와 같은 인간관계는 선별할 수 있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자녀들은 다들 '다른 집도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꾸준한 사랑과 애정으로 돌보는 집안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로 관찰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나중에 결혼을 해서 배우자와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다른 집에 살 기회를 얻어 그런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지 않는 다음에야 사실 거의 알 기회가 없습니다.


이 자기중심적인 이들은 사실 굉장히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그 끊임없는 갈증으로 인해서 사실상 그들의 일상은 기쁨보다 불안, 타인에 대한 증오와 시기, 슬픔, 분노와 같은 어둠의 요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 그들에게 하나의 심판이 됩니다. 나아가 그들의 이러한 악함은 결국 그들의 영혼을 어둠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들은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 목적을 위해서 타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꾸만 악에 가담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영혼이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무너져 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 구원에서 더욱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들과 일시적으로 만날 때에는 우리는 거의 그들의 '가면'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가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임계점'이 존재해서 그 이상의 시간이나 관계의 깊이에 도달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일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은 '위선'이라는 껍데기로 잘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을 잠깐 만날 때 우리는 심지어 그들을 '착한 사람'이라고까지 착각합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본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양선한 이들의 경우에 사람에 대해서 먼저 가지게 된 '좋은 인상' 때문에 그들의 현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흔히 너무나 착한 배우자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외모와 그의 능력치 정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결혼을 다들 미루는 형편인데다 사람을 만날 기회도 사실 별로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설령 만난다 할지라도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만남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뒤늦게 결혼을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내적 바라봄을 잘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가르치면 됩니다. 하지만 배울 의도가 없는 사람, 혹은 망치려고 드는 사람은 잘 하던 일도 망가뜨리게 됩니다. 물론 사람은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요소를 애써 외면하고 그저 외적인 요소로만 분별해서 성급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런 그에게도 탓은 존재합니다.


시체에 파리가 꼬여들고 꽃에 벌과 나비가 드나들듯이 우리가 내비치는 요소들이 주변에 작용합니다. 그래서 설령 주변에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이미 드러낸 무언가'와 연계된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자신의 부모가 그렇다면 그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밖의 경우라면 우리가 선호하는 인간관계가 주변에 모여든 것 뿐입니다. 술 좋아하는 이가 술친구를 불러들이고 산을 좋아하는 이가 같이 등산할 사람을 찾듯이 우리 내면의 공허는 또다른 공허를 끌어들이는 법입니다. 주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