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 갈증은 너무나도 뿌리깊은 것이라서 그 무엇도 사실상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만족을 얻는 순간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관심을 끌어올 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쉬운 수단은 '자기 피해자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의 관심을 끄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불쌍함에 동정이라는 관심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자신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스스로도 예상하기 때문에 때로는 남들에게도 '미끼'를 던져줍니다. 즉 필요에 따라서 남들 칭찬도 해 주고, 선물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일한 목적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자녀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 쉽습니다. 자신의 부모인 사람이 '정의'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기준으로 자녀들의 행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위를 하면 칭찬을 얻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에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자녀들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두운 내면을 가진 부모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동시에 앞서 말한 '미끼'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부모가 항상 '불쌍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위선적'인 사람이며 심지어 '악한'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릇되이 형성된 이 관념은 깨어지기가 꽤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와 같은 인간관계는 선별할 수 있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자녀들은 다들 '다른 집도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꾸준한 사랑과 애정으로 돌보는 집안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로 관찰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나중에 결혼을 해서 배우자와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다른 집에 살 기회를 얻어 그런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지 않는 다음에야 사실 거의 알 기회가 없습니다.
이 자기중심적인 이들은 사실 굉장히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그 끊임없는 갈증으로 인해서 사실상 그들의 일상은 기쁨보다 불안, 타인에 대한 증오와 시기, 슬픔, 분노와 같은 어둠의 요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 그들에게 하나의 심판이 됩니다. 나아가 그들의 이러한 악함은 결국 그들의 영혼을 어둠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들은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 목적을 위해서 타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꾸만 악에 가담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영혼이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무너져 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 구원에서 더욱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들과 일시적으로 만날 때에는 우리는 거의 그들의 '가면'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가면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임계점'이 존재해서 그 이상의 시간이나 관계의 깊이에 도달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일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은 '위선'이라는 껍데기로 잘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을 잠깐 만날 때 우리는 심지어 그들을 '착한 사람'이라고까지 착각합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본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양선한 이들의 경우에 사람에 대해서 먼저 가지게 된 '좋은 인상' 때문에 그들의 현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흔히 너무나 착한 배우자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외모와 그의 능력치 정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결혼을 다들 미루는 형편인데다 사람을 만날 기회도 사실 별로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설령 만난다 할지라도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만남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뒤늦게 결혼을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내적 바라봄을 잘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가르치면 됩니다. 하지만 배울 의도가 없는 사람, 혹은 망치려고 드는 사람은 잘 하던 일도 망가뜨리게 됩니다. 물론 사람은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요소를 애써 외면하고 그저 외적인 요소로만 분별해서 성급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런 그에게도 탓은 존재합니다.
시체에 파리가 꼬여들고 꽃에 벌과 나비가 드나들듯이 우리가 내비치는 요소들이 주변에 작용합니다. 그래서 설령 주변에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이미 드러낸 무언가'와 연계된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자신의 부모가 그렇다면 그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밖의 경우라면 우리가 선호하는 인간관계가 주변에 모여든 것 뿐입니다. 술 좋아하는 이가 술친구를 불러들이고 산을 좋아하는 이가 같이 등산할 사람을 찾듯이 우리 내면의 공허는 또다른 공허를 끌어들이는 법입니다. 주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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