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1,8)
이 짧은 문구에는 참으로 많은 영성이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을 위한 나아감이 우리 자신의 힘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혹자가 말하듯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주체성을 없애 버리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기’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해도가 없는 배는 아무리 자신의 힘이 엄청나도 엉뚱한 곳에 가 닿게 마련이고 암초를 피할 수 없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항해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하나의 방식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다른 환경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순간 현실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과정은 올바른 ‘나침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여정은 반드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기를 두려워합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이 일을 처리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전혀 신앙적인 발전이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이 만든 로드맵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나름의 영리함으로 아무리 궁리를 해도 결국에는 한계성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지요.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주제도 참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곧 ‘고난’을 포함한다는 것이지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이 세상 안에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쁜 소식은 분명히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쁨은 가장 완전한 기쁨이고 영원한 기쁨이라서 그 기쁨을 얻은 사람은 그 어떤 외적인 불안정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바라봅시다. 이 세상은 그 복음의 기쁨을 올바로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자신들의 ‘기쁨’, 즉 ‘지상의 기쁨’,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향후로 우리는 ‘쾌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쾌락을 추구하고 거기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기쁨, 즉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진정한 초대를 곧잘 무시하지요. 그래서 그들 앞에서 하느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로 초대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도리어 괴로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비슷한 상황을 직면하게 됩니다. 즉 세상의 자녀들이 괴로움을 겪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괴로움을 겪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대치상황 속에 두 부류의 반응은 완전히 반대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들 앞에서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들 앞에서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서로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한 측은 반대자를 만날 수록 더한 사랑의 그릇을 키우는 한편, 그 반대 측은 반대자를 만나면 더욱 분노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양자의 운명이 갈리는 것이지요.
복음을 따르려는 이는 반드시 복음에 따르는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따른다는 것은 곧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은 복음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동참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동참은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고 선택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 짐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그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미리 알고 그에 책임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결과를 올바로 예측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이 듭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쾌락’에 마음이 팔려서 거기에 뒤따라오는 결과물을 올바로 보는 경우가 없습니다. 마치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폐질환’이라는 결과물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 ‘간질환’이라는 결과물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에 젖어든 사람은 좀처럼 자신에게 뒤따르는 결과물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반면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 자신들이 고난에 동참하는 이유를 올바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물을 올바로 희망하기에 지금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 사랑, 희망이 형성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당의 외적 활동에만 익숙해서 살아가는 동안, 그리고 진정한 내적 고난의 도전을 자꾸만 회피하는 동안 우리는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