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6-17)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과연 인지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 악의 결과가 자기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올바로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들이마시는 그 연기가 자신의 폐에 어떤 작용을 하고 그 온갖 유해 물질들이 피에 섞여들어 구체적으로 각 순간마다 자신의 세포들에 어떤 파괴작용을 미치는지를 늘 바라보고 그 결과를 예측하면서 담배를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담배 한 대를 빨아들이는 동안의 좋은 기분 만을 즐기고 싶은 것이지요. 그 결과는 나중에 어떻게든 알아서 되겠지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올바른 인지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멈출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행동이 악을 실천하는 이들에게서도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악을 저지를 수 있지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악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좋은 사람’, ‘그나마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분별된 것으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단의 자매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어린 이야기가 잔뜩 나오게 되지요.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평가나 비판, 혹은 추측성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자매들은 저마다 본당 안에서 나름 한가닥씩 일을 맡아서 하는 이들입니다.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그 자매들은 자신들을 ‘열심한 신자’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주일 미사도 거르지 않고 심지어는 평일 미사도 꼬박꼬박 나오니까요. 하지만 그 자매들은 자기 스스로를 올바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과연 무엇이 진정한 선이며 하느님이 어떤 것을 하기를 바라고 어떤 행동을 그치기를 바라고 계신지 올바로 알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기보다 내적으로 정돈된 삶입니다. 그러면 외적으로 더욱 충실하고 진솔하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시간에 서로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사정을 나누는 것이 좋고 아니면 고독에 익숙해 지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자신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이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지요. 그들은 집에 혼자 아무 일 없이 머무르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사건이 터져야 하고 그래야 수다를 떨 거리들이 존재를 하는 것이지요. 정신은 산만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일단 말을 꺼내고 봅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은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과장되고 심지어는 거짓도 포함된 말을 하는 것이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에 잠기고 그나마 자신이 꺼낸 말에 대해서 반성하는 시간이라도 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로 ‘해야 하는 외적인 일’에 둘러싸여 반성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엄청 열심한 신앙인으로 드러나지만 실제 내면은 지독하게도 공허한 빈껍데기들일 뿐이지요.
이사야서는 우리가 악행을 멈추라고 충고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살리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들으면 기분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고쳐주려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억압받는 이, 고아, 과부’를 보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억압받는 사람이고, 누가 고아이며, 누가 과부일까요? 과연 이 세상에 고아가 그렇게 많고 과부가 그렇게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아라는 것은 자신을 보살필 아버지가 없는 이들을 말하고, 과부라는 것은 의지할 배우자가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즉 현시대에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 대상자가 된다는 말이지요.
온 세상을 돌아다녀 고아를 찾아다닐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고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바로 고아와 같은 존재이지요. 우리는 우리 영혼에게 진짜 아버지를 선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고아처럼 슬퍼하고 억압당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나를 해방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나면 비로소 주변 사람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즉 그들이 모두 너나할 것 없이 고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진짜 선행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보다 영적 전쟁에 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선택한 신앙은 세상적으로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고, 부족한 이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부족해 지기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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