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감독의 의도대로 영상으로 표현된 것을 바라보아야 할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들어야 할 뿐이다.
하느님은 박해 가운데 있는 선교사의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미 대답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박해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선교사였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언어 때문에 고생도 했고 남들이 좀처럼 가지 않으려는 곳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해야 했다. 4인조 택시 강도도 당해 보았고, 댕기열과 급성간염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하느님은 이미 하신 말씀을 나에게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다.
결국 돌이 생긴 쓸개를 떼내러 비행기에서 구토를 해 가며 한국에 왔고 또 오자마자 다른 신부님들이 좀처럼 떠맡지 않으려는 신설 본당을 짓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때마다 나에게 환시 중에 나타나서 계시를 주신다거나 내가 힘들 때에 옆에 다가오셔서 위로를 해 주시거나 한 적은 없다. 하느님은 침묵하셨고 그 침묵 가운데 묵묵히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여주셨다.
영화는 박해의 잔학상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선교사의 고민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교사의 고민에 동참하느라 대부분의 노력을 쏟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고민해 보아야 한다. 과연, 그 박행을 집행하는 이들의 내면은 어떠한 것인가? 진리를 전하러 온 선교사 앞에서 자신들의 나라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동족을 스스럼 없이 살해하며 그 선교사를 압박하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할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을 올바르게 갖추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일본인들의 박해의 원인이 천주교라는 엉뚱한 종교가 뜬금없이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그 박해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자칫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지나쳐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즉 그들의 온갖 악행 앞에서도 하느님은 침묵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법관이라면 그 악을 집행하는 이들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 처단하실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 속에 머무르신다. 왜냐하면 그 침묵은 그분의 자비이고 악인들 마저도 다시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이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리고 그 뒤로 그 십자가를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늘 다시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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