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것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용서 해야 한다고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애를 많이 먹지요.
그리고 용서를 하려고 하니 여러가지 것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기도 합니다. 즉 그를 용서하지 못할 수백 수천가지 이유가 아른거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전혀 뉘우치지 않는데도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도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용서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을 꿰뚫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용서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요.
먼저 세상 안에서의 용서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그가 다가와서 잘못을 뉘우치고 끼친 손해를 기워 갚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비로소 용서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철저히 ‘주고 받음’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십자가 상에서의 용서와 원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는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의와 자비’라는 것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마치 하나의 검에 날이 선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본질의 두 가지 측면이지요. 그리고 정의와 자비 모두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사랑은 자비로워야 하고 또 사랑은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영원 안에서는 반드시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바로 이 확고한 믿음 안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 안에서의 확고한 정의,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정의에 대한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우리는 그 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이름은 ‘자비’가 되는 것이지요.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갚음을 받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결과를 얻게 되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결과를 얻게 되지요. 하지만 문제는 한 번 선한 사람이 영원히 선할 것이며, 또 반대로 한 번 악한 사람이 영원히 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실수를 하고 심지어는 의지를 통해서 의도적인 잘못, 즉 죄를 짓지만 훗날에 뉘우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처음부터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우리는 순진하고 맑은 어린이였다가 죄라는 것에 다가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선인과 악인이 자리를 뒤바꾸어 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고 읽고 있는 나와 여러분들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절대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비’라는 주제가 대두되는 것이지요. 자비가 없으면 세상은 지독히 삭막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차의 완충장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차에 용수철이 없고 완충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차의 충격을 그대로 모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완충 장치가 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완화되는 것이지요.
만일 하느님이 정의를 곧이 곧대로 시행하는 분이라면 아마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벌써 그 정의의 결과물을 달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에 해당하는 벌들이 이미 집행되고 우리는 너덜너덜하게 살아가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되겠지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두려움에 떨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정의를 그대로 집행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뉘우침과 돌이킴의 기회, 즉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을 선택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용서라는 것은 바로 이 ‘자비’의 측면에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인들을 용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용서 받았고 ‘유예기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의 악인들에게 마찬가지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악인들이 선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단 목숨은 살려두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그가 일할 기회는 없는 셈입니다. 한 사람이 ‘사랑’을 배우려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정의를 집행하기를 보류하는 것은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는데 나아가서 그를 사랑해야 한다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 되는 것이지요. 악인들과 일단 급한대로 절교를 하고 관계를 끊고 만남을 회피할 수는 있겠는데 그들에게 다가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니 정말 미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직도 ‘사랑’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의 정의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러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그대로 하다가는 나도 ‘범법자’가 될 수도 있어서 참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흠도 티도 없는 분이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목숨을 바친 그 사랑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모자라서 매번의 미사 때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고 있는 그 사랑을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용서, 즉 ‘소극적 용서’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아무리 기워 갚아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가 더 철저히 뉘우치기를 강요하곤 하지요. 우리 안에 불이 지펴진 증오는 그것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용서’, 즉 누군가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를 참아 견뎌주는 일차적인 용서에도 이르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매번 잘못할 때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시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그 용서에 올바로 감사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사랑’, 즉 하느님의 외아들이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적극적 용서’에 이르기는 갈 길이 한참 먼 셈입니다.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이가 빛을 전해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극적 용서까지 이르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먼 것이지요.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부딪히고 힘들어하는 주제이기에 아무리 설명해도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훈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 뒷면에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서 삼고 걸어가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며 그분의 나라는 이런 사랑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에 우리가 분노하는 첫째 아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용서를 훈련해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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