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미움, 미워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된 말입니다.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사랑이 없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상대를 향한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파괴되고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라져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상대가 내 범주에 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손이 느끼는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손이 신경이 마비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즉 그 손은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움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워할 수 있는 수십가지 이유를 누군가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미움을 실행하는 이는 우리 자신의 의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의지’이듯이 미움 역시도 일종의 ‘의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기를 결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미움’은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하는 내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언제 어떻게 일어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요소인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는 역으로 미워할 만한 100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서 역으로 더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약한 이에게 사랑은 ‘조력’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잘못을 의지적으로 자행하는 이에게는 ‘충고’ 또는 ‘경고’로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소중한 ‘돌봄’, ‘사랑’, ‘애정’과 같은 보물을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는 돼지들이나 개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같은 보물을 받고도 그것을 물어뜯고 도리어 우리를 공격하려고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미움을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하고 우리 안에서 미움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대상에 합당한 유형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밥을 사주고 좋은 것을 입혀주고 좋은 여행을 보내 주더라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기는 커녕,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도리어 그것을 해 주지 않는다고 분노를 폭발하는 수준의 사람이면 그에게는 애정이 아니라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파견을 받은 동네에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경고의 표시로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나왔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국 신앙인은 같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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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