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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순수성



인간의 육체는 하자를 지니고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성향이 강화되거나 약화된 채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자유의지’는 어떨가요? 영혼에도 하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건 영혼의 창조자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온전히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세상’ 안에는 질병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서 바로 그 세상 안에 독이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지요. 그와 더불어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오류들도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선물하시는 영혼이 그 자체로 하자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손길을 의심하는 것이지요. 영혼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간에게 선물되고 남은 일은 우리가 그 영혼을 가꾸어 나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선한 의지를 꾸준히 실천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더욱 선한 일에 밝아지고 활성화되게 될 것이며 반대로 악한 의지에 마음을 쏟는다면 우리에게는 악이 더욱 활성화되게 될 것입니다.

그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담기는 육체와 정신에는 시작부터 부족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올바로 작용한다면 모든 부족함은 더욱 훌륭한 내적 가치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육체적 부족함은 그에 상응하는 영혼의 의지의 노력으로 더욱 훌륭한 내적 가치인 인내를 자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부족함을 악으로 수용해서 더욱 세상에 어두워지고 부정적인 영혼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완벽함’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곳에 태어날 수도 원하는 부모를 고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육신을 고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특정 영역을 반드시 수용하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여기서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은 키 150cm의 사람이 180cm의 사람이 뛸 수 있는 거리를 뛰어다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극복이라는 것은 영적인 극복을 의미합니다. 모든 육체적 한계를 뛰어 넘고서도 인간은 원한다면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물론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해 반발하고 싶은 분이 많을 것입니다. ‘내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당신은 기뻐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이지요. 모든 분들의 저마다의 고통은 분명한 실재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하느님 역시도 분명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다만 모든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신 하느님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생명도 의미없는 생명은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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