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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재앙



기적은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기계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어느 수준에 이르러 반드시 기적이 필요한 때가 되어 하느님이 반드시 해 줘야 하는 기적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순리’에 맡겨져 있습니다. 물론 그 ‘순리’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요.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의 순리에 따른 결과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악을 실천하는 이도 악의 순리에 따른 결과를 입게 되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는 악이 선을 압도하는 듯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영원’의 결과물을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영원 안에서 악은 반드시 악의 결과물을 입게 되고 선은 선의 결과물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기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이 기적은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볼 줄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내 배우자가 무사히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기적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별다른 난항이 없이 진행되는 것도 기적의 손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해서 기적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곧잘 신기한 일, 기괴한 일을 바탕으로 기적을 가늠하려고 드니까요.

반대편에 ‘재앙’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재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앙은 순리에 따른 악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당신의 자비로 그것을 늦춰주고 계셨거나 참아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재앙의 이면에는 수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이미 벌써 자신을 소홀히 돌보아 온 결과로 죽어 마땅한 생명인데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헌데 그들은 그런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에 재앙이 닥쳤다고 투덜대지만 실제로는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 꾸준히 기적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재앙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순리를 만드시고 그것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적이 선익을 끼칠 때에 기꺼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기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 사건,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기적의 손길을 얻어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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