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었을 터인데…



처음부터 미친듯이 엇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악한 영에 개방하여 그 영에게 주도권을 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강렬한 어둠의 영의 조종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미미한 조짐만이 보일 뿐입니다.

누구나 다 하는 것 정도의 탐욕과 이기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엇길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생겨난 탐욕과 이기심에 또다른 탐욕과 이기심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탐욕과 이기심을 꾸준히 유지하여 고착화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옷에 묻은 이물질을 금방 씻었으면 나아졌을 것을 그냥 그대로 두어 딱딱히 굳어버린 얼룩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음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심한 것들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마음은 곧잘 분노, 격분에 시달리게 되고 거짓을 밥먹듯이 하게 되며 선한 일에 둔해지고 악한 일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내면에서 서서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 크나큰 죄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내면에서 힘을 견디던 지지대가 뚝! 하고 부러지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뭔가 큰일이 났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하느님을 찾고 사제를 찾아서 방황을 시작합니다.

흐르는 수돗물에 잠깐 옷을 빨면 되었을 일을 이제는 세제를 구하고 표백제를 구하고 특별한 세탁 기법을 써야 겨우 옷이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얼룩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옷을 빨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옷이 그렇게 더러워져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도대체 누구에게 자신의 옷을 맡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엉망이 된 마음을 이끌고 소위 ‘용하다는’ 사람은 모조리 찾아 다닙니다. 그렇게 더듬거리며 찾다가도 때로는 참된 예언자를 만나기는 하지만 정작 그를 만나도 신뢰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온통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눈 앞에 예언자를 두고도 믿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신앙을 잃었다구요? 냉담을 시작했다구요? 어쩌면 그건 ‘결과’일 뿐인지 모릅니다. 그 일은 이미 여러분의 냉담에서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주 작은 회심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부모님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마저도 내팽개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