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서는 툭하면 세미나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대두되면 일단 그에 관련한 세미나를 열고 봅니다. 물론 문제를 파악하고 접근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왜 곧잘 세미나만 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 즉 마음에 부담이 덜 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열면 패널들이 초청되고 그들을 통해서 의견들이 정돈되어 하나의 메뉴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뉴얼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일단은 뭐든 했다는 안도감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즉 문제의 본질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로 그에 상응하는 메뉴얼, 규정집, 강의록을 지니고 있다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똑똑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 사회는 똑똑한 사람은 넘쳐 흐르는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신학 세미나를 열면 신앙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에 불이 나도록 그런 곳을 다녀봐야 느는 것은 ‘지식’ 뿐이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크려면 신앙을 키우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건 하기 싫은 것이지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긴 싫고 ‘호랑이를 잡는 법’에 관해서 호랑이에 대해서 배운 서울대 동물 행동학 교수(그마저도 호랑이를 본 적은 없는 사람)를 만나서 호랑이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배우고 그 메뉴얼을 받으면 이미 호랑이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호랑이는 학위도 없는 무식한 사냥꾼이 용기있게 직접 동굴에 가서 잡아 버리는 것이지요.
이제 대림 9일기도의 시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통해서 신앙을 키우기를 원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것은 그러한 특별한 강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실천입니다. 사실 우리는 필요한 지식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누가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일곱 번에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말을 누가 듣지 못했습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설명을 한다고 해도 내 안의 의지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의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일상 안에서의 아주 작은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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