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 3,8)
죄의 가책은 싫습니다. 하지만 내가 즐기던 그 죄의 달콤함을 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묵직한 양심의 무게는 싫고 벗어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죄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육적으로 느끼는 쾌락은 너무나도 황홀한 것이라 그 또한 내려놓기 싫은 것이지요.
이상한 표현이지만 죄를 싫어서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때에는 그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명예가 깎이고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당시에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도 그러한 행위 자체가 설레고 달콤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는 사랑하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죄를 짓고 난 뒤에 죄책이 다가오는 것은 싫은 것이지요. 죄를 짓기 전에는 맑았던 마음이 죄로 인해서 어두워져 있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가중되어서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다시 빛을 찾아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즉 울며 겨자먹기로 죄를 고백하러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죄를 사랑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죄를 벗어버려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죄 자체를 혐오하게 되어서 빛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빛과 맞닥뜨릴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둠을 벗어 버리려는 이들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이 하는 것도 일종의 ‘회개’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회개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고 피상적인 것입니다. 즉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열매가 없는 회개’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런 뉘우침, 즉 가식의 뉘우침을 거친 이들은 머지 않아 다시 똑같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넘어짐은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애시당초 그들은 이미 죄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뉘우칠 줄 알아야 하고 ‘죄’라는 것의 본질을 알고 그 추악함과 더러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미치는 더러운 영향을 올바로 알아 그것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단순히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빛을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의 아름다움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 그것을 원하게 되고 그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떨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신앙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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