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주제는 늘 알쏭달쏭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정해진 삶의 길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지? 무언가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내가 구태여 기를 쓰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고, 또 반대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애를 쓴다 한들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니까요.
예컨대 내가 사제가 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굳이 사제가 되려고 노력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 것이고 또 내가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다면 신학교에 들어간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운명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리를 하려고 작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요리에 관한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요. 하나의 운명이 정해진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확인하고 어떤 재료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그때그때 분별을 합니다. 된장째개를 끓이려고 두부를 찾는데 냉장고에 있는 두부가 썩어 있으면 그것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냥 두부를 빼고 끓이거나 가까운 슈퍼에 가서 두부를 사 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 나의 냉장고에 두부가 있었다고 무조건 넣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한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소위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의 ‘섭리’라고도 하지요. 하지만 그 뜻에 우리가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의 뜻을 내던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루카 7,29-30)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한 섭리로 우리에게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의 세세한 삶의 단계들을 모두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마음에 품으신 거대한 계획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준비해서 그분의 뜻에 합당한 이들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당신의 뜻에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선을 추구하고 의로움을 이루는 사람, 거짓된 말을 하지 않으며 참된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의 중요한 부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헛된 것을 찾는 이들은 하느님의 그 뜻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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