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사람들이 종교에 실망할 때는 하느님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껍데기에 대한 실망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에게 실망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착각을 할 뿐이지요.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올바로 접근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분을 담아내어야 하는 껍데기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본질에 접근하는 이에게 부수적인 요소는 그야말로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도 그분을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요. 지금의 기성 종교가 하느님을 올바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서 열심히 미사를 드리지만 그 영혼이 충만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있을까요? 정말 기쁜 소식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들이 복음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지지부진한 종교의 틀만을 꼭 쥐고 정작 복음은 상실하고 말았을까요?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복음을 생활화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고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이 존재하지 않고 또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 현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닌 문제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 때문에 교회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학술회를 열었지요. 또 심포지엄과 세미나도 많이 열었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과 방법론에 길들여진 교회는 연구를 많이 하면 신앙이 더욱 밝혀지고 늘어날 것이라고 착각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보다 본질적인 것을 소홀히 했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사랑은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몫이지요. 교회는 공부는 많이 했고 학식은 늘었지만, 또 문화적으로도 많은 유산을 지니고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미흡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배운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 인내가 많은 이들이 선한 의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오류와 착오들을 올바로 식별해 나가야 합니다. 같은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을 두고 한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찾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메마른 가슴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메뉴얼화된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봉사의 자리’도 리스트를 만들어 놓아 버렸습니다. 즉 시설을 방문한다던가 요양원을 방문한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그런 자리에 가서도 사랑이 전혀 없는 울며 겨자먹기의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간과됩니다.

사랑의 실천은 외적인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인 문제이며 우리의 결심의 문제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장 뜨거운 사랑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분주하게 다른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외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내면은 마리아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우리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을 시작해서 그것을 외적인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사랑을 지닌 이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가꾸어 갑니다. 마치 어부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낚는 어부가 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곧잘 하는 일에 예수님을 받아들여 그 일을 거룩한 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올바로 일깨우고 우리를 공연한 걱정거리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아직 신앙이 없는 이들이 그 향기를 통해서 다가와 참된 기쁨을 누리게 도와줄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5-16)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