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사 48,18-19)
하지만 이제 너는 평화롭지 못하고 의로움도 간직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세상에서는 세도를 부리고 수많은 이들이 너에게 굽신거렸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무도 너를 기억해주지 않겠구나. 네가 나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교회의 규율과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복재를 지키느냐 금육을 지키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근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한 가치들을 진정으로 내 마음으로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선, 사랑, 용서, 친절, 인내, 겸손과 같은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을 이웃을 통해서 실천할 때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진실과 정의와 신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외적인 섬김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교만을 키우는 꼴입니다. ‘나는 묵주기도를 하루에 20단씩 바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니 너희 같은 천박한 이들과는 달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는 결코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가 바치는 기도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을 눈앞에 두고 그분을 시기하고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던 이들이었지요.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이 교회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여 그러한 것들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이들이 되어야 하고 남들에게 선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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