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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 교육의 산물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그림'에 관심이 많다. 중학생 무렵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한 일본 만화의 '이쁘장한 그림들'로 내 눈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란마 2분의 1,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 나디아, 시티헌터... 나는 만화책을 살 때에도 내용보다는 그림체를 위주로 많이 사곤 했다. 그래서 처음 당시의 500원짜리 드래곤볼 만화가 그때그때의 양을 다 채우지 못해 다른 만화들을 슬슬 끼워 넣으면서 접하게 된 '슬램덩크'의 그림체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딴 그림체로 만화를 그린다는거지?"라고 생각했다.
슬램덩크 1화를 보면 그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하게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짱구는 못말려'가 나왔을 때에는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다. 이런 걸로도 먹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에도 깨달은 게 있다. 하나는, '아름답다'는 건 문화적인 교육의 산물이라는 거다. 그림체는 엉망이었지만 엉뚱한 스토리로 재미있어 읽기 시작한 짱구는 못말려를 통해서 '아름답다'는 건 결국 '상대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은 그 형편없는 그림체로 인해서 아름답고 말고가 없다. 하지만 그 그림 안에서도 내용 설정상 소위 '아름다운'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냥 대충 눈 두개 그리고 대사를 '아 아름답다', '아 이쁘다'라고 집어넣으면 그 사람은 이쁜 사람이 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은 실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그때 당시의 문화 수준으로 교육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거다. 옛날의 한국 미녀는 '미녀도'에 나오듯이 눈이 갸름하고 소박한 얼굴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녀'는 서구화의 영향으로 큰 쌍꺼풀에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콧날을 강조해야 한다. ㅎㅎㅎ 한국 사회에서 만일 그 미의 기준을 모두 충족하고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결국 다들 인조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는거다.

지금의 세계화 추세로 봤을 때에 10년후의 미녀는 오히려 더욱 오리지널 동양적인 사람이 미인으로 판별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그게 국제적 추세기 때문이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쌍꺼풀 없는 눈매를 너무나 이뻐하고 귀여워한다. 그리고 정보가 공유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결국 우리 스스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움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한국은 너무나 갇혀진 사회다. 우리끼리 오밀조밀 살다가 외국 문물이 들어오니 저마다 베끼기에만 바빴고 우리 고유의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제면 다 튼튼하고 일제면 다 정밀한 줄 알았다. 상품은 그렇다쳐도 우리 본연의 자연스러운 미는 그렇지 않다.

지금 얼굴이 딸린다고 고민하는 그대여, 그대는 충분히 아름답다. 지금 더 필요한 화장은 '미소' 뿐이다.

그런 고로 나는 충분히 잘 생겼다고 생각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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