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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나는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건 하느님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균형과 조화'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이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눈코입의 위치와 비율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훈련되어 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통통한 여자들이 인기가 많았다.
서양 예술사의 그림 안에 나오는 여인들은 체격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뼈다귀를 좋아한다.
칼슘이 부족한 모양이다. ㅋ
(아, 무릎 도가니탕 먹고싶다...)

마치 냄새가 코에 적응되어서 악취가 악취로 느껴지지 않듯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던 구조가 점점 변해가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이상한 것까지도 아름답다고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다.
수술은 환자를 위한 건데, 요즘은 많이들 수술을 받는다.
자기 얼굴을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의 이 열풍들은 모두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다.
또 세기가 흘러서 우리의 외모가 재평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자연스러움이 더 인정받을 날이 오겠지.
과거 전쟁 직후에는 많이 먹으면 최고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웰빙'을 찾는다.
외모에 대해서도 이 시대가 멀지 않았다.
지금은 무조건 '아름답기'만을 원하지만,
향후에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더 극찬을 받을 시기가 온다.
(두고봐라, 손 하나 안 댄 내 얼굴이 최고의 미남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ㅋ)

'균형과 조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몸과 영의 조화이다.
몸이 아무리 멋져도 그 영이 추하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외적인 건 금방 질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고 속으로는 깡통인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고 싶지는 않을거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잊고 있다.

"이 위선자야, 마음을 먼저 닦아라 네 온 몸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질책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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