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는 기본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형제다.
(물론 최근의 제도교회의 경향으로 보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제도는 보통은 제도의 친구다. 왜냐하면 한 제도가 무너지면 다른 제도도 위태해지니까 당연한거다. 그래서 국가가 전복되면 제도교회는 위험해지지만 '하느님의 교회'는 죽지 않는다. 아, 상당히 위험한 수준의 발언이다. ㅎㅎㅎ)
하지만 언젠가는 이 가난한 이들과 교회가 부딪히게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 편인줄 알았다.
뭐 대체로 그랬다.
하지만 제자들이 뻘소리를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중하기도 했다.
말을 안 듣는 고을에 불을 내리려는 제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거부하던 베드로,
누가 더 으뜸인가를 다투던 제자단,
풍랑에 두려워하던 그들...
예수님은 그런 순간들에 제자들을 다그쳤다.
다행히 교회는 아직 가난한 이들을 그렇게 배려하지 않아,
이 최악의 순간이 아직은 멀리 유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현재가 더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언젠가 교회가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 보다
지금처럼 제도걱정을 하기보다는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의 삶을 보살펴가다가 보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 있다.
그것은 근본 세상의 방향과 영의 방향의 충돌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상 안에서 부딪히는 것들은 이 근본 충돌의 작은 표출들이다.
단순화 시킨 예를 들어보면,
"성당을 갈까? 놀러를 갈까?"
양측으로 이유가 100가지씩 나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도 잘못되었다.
제대로 질문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섬길까? 나를 섬길까?"
예를 들어, 1년에 한 번 첩첩산중 시골에 사시는 시부모 만나러 가기 싫어서
주일엔 성당에 꼭 가야 한다, 안가면 성사봐야 한다는 며느리는
성당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꼴이다.
하느님을 보다 본격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언젠가는 교회가 사랑하던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 뿔을 세울 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던 여인을 질책하던 유다에게 예수님이 했던 말을 잊지 말자.
가난한 사람은 어딜 가나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주된 노선은 가난한 이를 향하는 것이 맞지만,
근본 방향은 그들 안에 머무는 하느님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들 안에서 '탐욕과 사리사욕'을 발견할 때에는,
때로는 과감하게 그들에게 질타를 해야 하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가난한 것은 분명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가난한 것이 감투가 되어서도 안된다.
오직 하느님만이 완전하시고,
우리가 내세울 것은 그분 뿐임을 잊지 말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