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지는 어디까지이고 하느님의 뜻은 어디까지인가?
신앙인들의 흔한 표현 중에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는 표현이 있다.
정말 다 하느님의 뜻인가?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디까지를 원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의지를 발할 수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첫째로,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면,
우리는 로봇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로봇...
그런 극단적인 운명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딱 좋다.
해 봐야 소용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높은 존재, 전능한 존재가 이미 짜 놓은 틀이거늘
내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요,
그 안에서 그 뜻을 이루려고 더 신경쓰는 것도 허무한 일이다.
프로그램은 결코 운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윈도우용 프로그램과 맥용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거다.
그럼,
하느님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관점 또한 조금은 이상하다.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누구는 오렌지를 누구는 사과를 누구는 파인애플을 원한다.
누구는 담배를 태우고 싶어하고 누구는 술을 좋아한다.
누구는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고,
누구는 자기만 잘 살면 된다.
누구는 공산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자본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사회주의, 누구는 민주주의...
서로서로 그 뜻이 갈려 있다.
우리의 원의, 바램에는 그 보다 순수한 방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걸 아는거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두 자유가 상충되고 있다.
자리를 잘 잡아보자.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창조주가 내어준 것이다.
우리의 자유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왜 주셨을까?
우릴 가지고 노실려고?
아니다.
오직 자유만이 참 사랑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로봇으로 느낄 수가 없다.
사랑은 자유의지를 가진 대상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싶으셨고,
그래서 아들도, 성령도,
더 나아가 우리도 만드신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큰 틀을 짜시고
우리를 거기에 '초대'하고 계신다.
이제 남게 되는 문제는,
[자유를 지닌 우리가 그 하느님의 큰 틀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정수기 윗물에서 아랫물로 빠져 나가면서 불순물은 걸러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려 하시고,
그 사랑에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이들은 영원히 그 사랑 안에 몸담게 될 것이요,
그 사랑에 반하는 자는 스스로를 걸러지게끔 준비하고 있는 자이다.
좀 더 명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하느님께 의지를 봉헌한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될 것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최종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께 의지를 봉헌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걸 추구하는 이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최종 목적지와는 정반대에 머물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완전 비싼 구두를 사고 싶다. 하느님의 뜻인가? 하느님께 여쭈어 보라. 말씀해 주신다.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양심의 어두움으로 말씀해 주신다. 살려는데 뭔가 찝질한 구석이 있다. 그러면 그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사도 아무 상관 없다.(다만 양심이 무뎌질 수 있다는 건 알아두자,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에게 거짓말은 더이상 죄로 느껴지지 않는다.) 잘 모르겠고 혼동스럽다면, 하고 싶은 걸 하라. 그리고 그 뒤에 다가오는 것들을 잘 분별하라. 그리고 그 뒤에 마음이 어둡다면 하느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뉘우치도록 노력하자.
다른 예로, 나에게 여러가지 힘든 상황이 닥친다. 하느님의 뜻인가? 내가 그 힘든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해 낸다면 하느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 뜻일 뿐이다. 내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다. 그 상황에서 내가 그 친구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잘 지내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저 나를 미워하는 그 친구에게 복수하고 싶어하고 미워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 뜻만 찾는 것이다.
덧붙여...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는,
제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해 온
'불순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성경의 많은 강한 표현 덕분으로 '영원한 고통, 영원한 불'이라는 지옥 개념을 지니고 있지만,
과연 이 개념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인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지구는 네모나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
실제로는 지옥이 어떠한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의 많은 표현들 중에서,
가슴을 칠 것이라는 표현,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표현,
이를 미루어 볼 때,
'불순물'들이 후회와 질투와 분노에 가득차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헌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느님의 큰 틀은 '사랑'일진대...
이 '사랑'을 '교회규정'과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거다.
그들은 죽어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그들이 지닌 지위와 교회적 지식으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착각했고,
그 어리석은 행위는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교회의 중산층화,
교회법의 강화,
가난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는
...
에이 그만하자. ㅎㅎㅎ
오늘은 여기까지.
첫째가 말째가 되고 말째가 첫째가 될 것이다.
너희들보다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위선자야, 잔과 접시를 닦을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닦아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흔한 표현 중에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라는 표현이 있다.
정말 다 하느님의 뜻인가?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디까지를 원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의지를 발할 수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첫째로,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면,
우리는 로봇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로봇...
그런 극단적인 운명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딱 좋다.
해 봐야 소용 없기 때문이다.
나보다 높은 존재, 전능한 존재가 이미 짜 놓은 틀이거늘
내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요,
그 안에서 그 뜻을 이루려고 더 신경쓰는 것도 허무한 일이다.
프로그램은 결코 운영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윈도우용 프로그램과 맥용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거다.
그럼,
하느님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관점 또한 조금은 이상하다.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누구는 오렌지를 누구는 사과를 누구는 파인애플을 원한다.
누구는 담배를 태우고 싶어하고 누구는 술을 좋아한다.
누구는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고,
누구는 자기만 잘 살면 된다.
누구는 공산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자본주의가 최고라 하고
누구는 사회주의, 누구는 민주주의...
서로서로 그 뜻이 갈려 있다.
우리의 원의, 바램에는 그 보다 순수한 방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걸 아는거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두 자유가 상충되고 있다.
자리를 잘 잡아보자.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창조주가 내어준 것이다.
우리의 자유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왜 주셨을까?
우릴 가지고 노실려고?
아니다.
오직 자유만이 참 사랑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로봇으로 느낄 수가 없다.
사랑은 자유의지를 가진 대상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싶으셨고,
그래서 아들도, 성령도,
더 나아가 우리도 만드신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큰 틀을 짜시고
우리를 거기에 '초대'하고 계신다.
이제 남게 되는 문제는,
[자유를 지닌 우리가 그 하느님의 큰 틀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정수기 윗물에서 아랫물로 빠져 나가면서 불순물은 걸러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려 하시고,
그 사랑에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이들은 영원히 그 사랑 안에 몸담게 될 것이요,
그 사랑에 반하는 자는 스스로를 걸러지게끔 준비하고 있는 자이다.
좀 더 명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하느님께 의지를 봉헌한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될 것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최종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반대로 하느님께 의지를 봉헌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걸 추구하는 이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요 최종 목적지와는 정반대에 머물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완전 비싼 구두를 사고 싶다. 하느님의 뜻인가? 하느님께 여쭈어 보라. 말씀해 주신다.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양심의 어두움으로 말씀해 주신다. 살려는데 뭔가 찝질한 구석이 있다. 그러면 그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사도 아무 상관 없다.(다만 양심이 무뎌질 수 있다는 건 알아두자,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에게 거짓말은 더이상 죄로 느껴지지 않는다.) 잘 모르겠고 혼동스럽다면, 하고 싶은 걸 하라. 그리고 그 뒤에 다가오는 것들을 잘 분별하라. 그리고 그 뒤에 마음이 어둡다면 하느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뉘우치도록 노력하자.
다른 예로, 나에게 여러가지 힘든 상황이 닥친다. 하느님의 뜻인가? 내가 그 힘든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해 낸다면 하느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 뜻일 뿐이다. 내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다. 그 상황에서 내가 그 친구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잘 지내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저 나를 미워하는 그 친구에게 복수하고 싶어하고 미워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 뜻만 찾는 것이다.
덧붙여...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는,
제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해 온
'불순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성경의 많은 강한 표현 덕분으로 '영원한 고통, 영원한 불'이라는 지옥 개념을 지니고 있지만,
과연 이 개념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인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지구는 네모나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
실제로는 지옥이 어떠한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의 많은 표현들 중에서,
가슴을 칠 것이라는 표현,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표현,
이를 미루어 볼 때,
'불순물'들이 후회와 질투와 분노에 가득차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헌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느님의 큰 틀은 '사랑'일진대...
이 '사랑'을 '교회규정'과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거다.
그들은 죽어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그들이 지닌 지위와 교회적 지식으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착각했고,
그 어리석은 행위는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교회의 중산층화,
교회법의 강화,
가난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는
...
에이 그만하자. ㅎㅎㅎ
오늘은 여기까지.
첫째가 말째가 되고 말째가 첫째가 될 것이다.
너희들보다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위선자야, 잔과 접시를 닦을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닦아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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