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자신 안에 답을 정해놓고 따지듯이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기에 그에 합당한 것을 전해 주어야 하지만 이미 자신 안에 무언가가 정해져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답을 주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겸손하고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지만 두번째 사람은 교만하고 모든 것을 내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대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초등학생과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망가진 어른의 마음보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서 배울 것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리함은 천상의 지혜를 어리석음으로 간주합니다. 얼마든지 따지고 싸우고 이길 수 있는 판에 ‘십자가’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음이지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자신 안에 답을 정해놓고 따지듯이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기에 그에 합당한 것을 전해 주어야 하지만 이미 자신 안에 무언가가 정해져 있는 사람은 그 어떤 답을 주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겸손하고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지만 두번째 사람은 교만하고 모든 것을 내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대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초등학생과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망가진 어른의 마음보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서 배울 것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리함은 천상의 지혜를 어리석음으로 간주합니다. 얼마든지 따지고 싸우고 이길 수 있는 판에 ‘십자가’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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