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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대화라는 주제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미묘한 주제입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대화’의 부족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게 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자신이 쓰는 ‘의자’를 상대로 화내지는 않지요. 어쩌다 자신이 잘못해서 발가락을 부딪혀서 순간 화가 날 수는 있어도 의자를 앞에 두고 분노와 원한을 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자의 기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언어’를 선물하셨습니다. 바로 그 언어를 통해서 상대의 내면을 알아내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귀찮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방식대로 상대를 다루려고 하지요. 상대가 오늘은 오렌지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내일은 사과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노력을 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오렌지만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안에서 언제나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과 매일같이 대화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필요한 때에는 진중한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세세한 일거수 일투족까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요. 우리는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삶을 가꾸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하게 되는 것은 소위 ‘방향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더라도 방향이 같다면, 즉 목적지가 같다면 우리는 잘 가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방향성을 올바로 알고 신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이 방향성이 굉장히 불투명합니다. 그들은 나름의 ‘선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의의 궁극적 방향이 올바로 정해져 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오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는 뚜렷한 하나의 목적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길마저 같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고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지요. 바로 이것이 대화의 핵심입니다. 특히 신앙으로 하나된 부부 사이의 핵심이지요.

루카 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것이요, 여러분을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파견하신 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루카 10,16)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 내면의 방향성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성 안에서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설령 다른 존재가 길을 달리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가정의 부부 사이의 근본은 바로 신앙입니다. 모든 것은 바로 이 신앙을 바탕으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가 같은 길을 가기에 안심할 수 있고 설령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를 기다려 줄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 신비적인 차원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대화’라는 것입니다.

대화는 그 간극을 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록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하더라도, 비록 우리가 같은 방향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미흡함과 소홀함이 있게 마련이고 바로 이 간극을 메꾸는 것이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에게 있어서 대화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내면의 근본 방향에 대한 서로 간의 진지한 대화,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간극을 메꾸는 소소한 대화가 늘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해야 하고 소통해야 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특히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일수록 우리는 더욱 소중히 다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1코린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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