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끌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가장 근본 기준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찾는가 어둠을 찾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숨어들어 있는 것이지요.
한편 우리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빛에 대해서 배우고 어둠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그리고 빛을 추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어둠을 벗어나도록 가르침을 받지요.
만일 이 가르침이 올바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고 그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이며, 그 부족한 가르침을 전해받은 이는 책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서로 증오하고 서로를 배척하면서도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는 법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제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제가 부족했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그런 부족한 이들이 모인 교회에 함께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눈에 띈다고 해서 교회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원래부터 완벽한 단체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런 교회를 선물받은 것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서로를 도와야 하는 공동체이지요.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딘가는 반드시 부족함이 있게 마련이지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성을 분별할 수 있고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부족한 것을 열심히 메꾸어 가며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저의 분별이고 동시에 결심인 셈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호를 찾아 나섭니다. 때로는 교회의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교회 전체를 떠나기도 하고, 또 자신 안에 숨겨진 어둠을 선호하는 경향에 따라서 어둠을 찾아 나서기도 하지요. 빛을 찾는다고 나섰다가 속는 경우도 있고, 또 어둠에 머물러 있다가 뒤늦게 빛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단순히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고 ‘결심’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미혹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 미혹을 실천한 이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스스로 결심한 부분에 있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과연 사이비 종교를 추종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아무런 탓도 없이 속이는 자들의 죄 때문에 끌려 들어간 것일까요? 과연 그 수많은 이들의 자유의지는 그 동안 죽어 있기만 한 것일까요? 천만에요. 그들의 자유는 어느 순간에도 반대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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