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님, 이성은 바람직하고 좋은 걸 생각을 하는데 감정이 정리가 안되요. 언제쯤이면 감정을 다스리는 게 가능해 질까요?
- 글쎄요. 저도 궁금하네요. 언제쯤이면 그게 될까요? (앞에 연세가 있으신 다른 자매님에게) 언제쯤이면 그게 되던가요?
- (웃으시면서) 안됩니다. 아마 평생을 가도 그건 안될걸요.
그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도전거리가 있을 것이고 그런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우리의 이성은 언제나 바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감정을 추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훈련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훈련할 수 있고 우리의 지성도 훈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합당한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인내’라는 덕목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해서 감정의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인내라는 덕을 바탕으로 쌓지 않으면 금새 튀어나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요.
인내는 즉각적인 반응을 삼가하게 도와주고 우리가 하려는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시간을 벌어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대부분 우리가 하려던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은 그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이유는 ‘공격 받았다’고 생각하고 ‘억울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인내가 자리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신앙’이라는 덕목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억울함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해야 할 분이 별다른 저항 없이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내가 처한 현실에서 내가 당하는 억울함을 다시금 점검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용수철은 누르면 반발하는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 내면에 형성된 ‘억울함’에 대한 마음도 누르면 결국에는 그 두 배의 힘으로 폭발하여 뛰쳐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용수철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용수철을 치워내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이 절절히 드러난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충분히 받는 사람은 억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함에 크게 웃도는 사랑을 하느님에게 받는 사람은 상대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마음이 메마른 사람일수록 억울함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억울해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억울한 분과 그분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충분히 훈련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하게 도와주는 것은 바로 ‘인내’와 ‘신앙’이라는 두가지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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